인문

읽을 수 없는 사회: 문해력 위기의 진짜 얼굴

김주만 전도사 2025. 7. 26. 14:54

문해력의 저하가 단순히 교육 방식의 문제로 다뤄지는 시대다. 스마트폰의 남용, 짧은 영상 콘텐츠의 범람, 독서의 감소가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지만, 이는 문제의 표피일 뿐이다. 디지털 문명과의 충돌로 인한 일시적 현상처럼 설명되지만, 실제로 문해력 저하는 훨씬 더 깊고 구조적인 뿌리를 가진 문제다. 단순히 책을 읽지 않아서 생긴 게 아니라, 글을 읽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동기와 배경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가 자리하고 있다.

 

‘아비투스(habitus)’는 우리가 자각하지 못한 채 내면화한 삶의 방식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디서 자랐고, 어떤 언어에 노출되었고, 어떤 삶의 규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는가에 대한 총합이다. 어떤 사람은 글을 읽을 때, 문장 너머의 맥락과 배경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주어진 정보를 비판적으로 해석한다. 반면 어떤 사람은 같은 문장을 읽어도 표면적인 단어 뜻만 해석하고, 핵심이 무엇인지 붙잡지 못한 채 혼란에 빠진다. 이 차이는 단지 국어 점수의 차이가 아니라, 살아온 삶의 구조가 다르다는 신호다.

 

문해력은 단순히 글자를 읽는 능력이 아니다. 세상과 자신을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힘이다. 그런데 이 힘은 개인의 노력으로만 쌓이지 않는다. 문해력은 구조적으로 ‘물려받는’ 것이다. 책이 놓여 있던 식탁, 질문이 오가는 저녁 대화, 어릴 적 경험한 언어적 자극,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되물어주는 태도. 이런 것들이 아비투스를 만들고, 아비투스는 결국 문해력으로 드러난다. 부모가 단순히 책을 읽어주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건, 언어와 사고를 존중하는 문화가 일상 속에 깃들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부르디외는 이것을 ‘문화 자본’이라고 불렀고, 이 문화 자본은 대물림된다. 문제는 이 대물림이 공정하지 않다는 데 있다. 격차는 점점 커지고, 문해력은 어느새 신분의 지표가 되어간다. 그러니 문해력 저하를 단순히 ‘공부 좀 더 하라’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 이는 존재의 조건이 다른 사람들에게 ‘노력 부족’이라는 말을 강요하는 것이고, 결국 교육의 책임을 오롯이 개인에게 돌리는 무책임한 태도가 된다.

 

공교육은 이 격차를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였지만, 지금의 공교육은 이미 아비투스 격차를 감당할 여력을 상실했다. 같은 교실, 같은 교과서, 같은 시험지를 받아도 해석하는 능력은 제각각이다.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해석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능력은 오직 시험 점수나 정답 암기로는 길러지지 않는다. 수업 시간에 질문 하나 못 던지는 아이, 자기 생각을 글로 써보라고 하면 손이 멈추는 아이, 배경지식이 부족해 교과서를 읽다가 매번 뜻을 놓치는 아이에게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그 대안은 먼저, ‘비판적 문해력’ 교육이다. 문해력은 중립적 기술이 아니다. 어떤 글을 읽고, 어떻게 반응하고, 무엇을 질문하는가는 독해력을 넘어 ‘해석력’과 ‘비판력’의 문제다. 글의 논리를 파악하고, 숨은 전제를 읽어내고, 다양한 관점을 가늠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훈련은 단지 국어 시간에만 이뤄질 수 없다. 사회, 과학, 윤리, 예술 등 전 교과에서 학생의 해석 능력을 끌어올리는 교육 전환이 필요하다. 지식을 ‘전달’하는 교실이 아니라, 지식을 ‘다루고 질문하는’ 교실로의 변화다.

 

둘째, 교육은 ‘기회의 평등’만이 아니라 ‘출발점의 평등’을 고민해야 한다. 모든 아이들이 같은 교과서로 시작하더라도, 실제 출발선은 이미 다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선 문화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적극적 정책이 필요하다. 방과후 독서 프로그램, 가정 방문형 언어지도, 지역사회 중심의 독서 멘토링 등, 아비투스 형성에 실질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개입이어야 한다. 그저 도서 기부나 캠페인에 그치지 않고, 생활 속에 언어 환경을 구축하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

 

셋째, 교사의 역할이 다시 강조되어야 한다. 교사는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존재가 아니라, 학생의 세계를 ‘번역’하고 ‘자극’하는 존재다. 문해력을 키우기 위해선, 교사 자신이 풍부한 독서 경험과 언어 감각, 그리고 철학적 사고를 갖추어야 한다. 교사의 말과 질문이 학생의 사고를 형성하는 모판이 되기 때문이다. 교사 양성과 재교육 과정에서 문해력 교육이 핵심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책 읽는 교사, 대화하는 교사, 질문하는 교사 없이는 문해력 회복은 불가능하다.

 

이제는 사회 전체가 문해력 문제를 단순한 학습 능력의 문제가 아닌 ‘민주주의의 위기’로 인식해야 한다. 문해력이란 곧,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능력이며, 다양한 관점을 존중하는 힘이며, 세상의 복잡함을 인내하며 이해하려는 지적 태도다. 읽을 수 있는 능력이 곧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읽을 수 없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가짜뉴스에 속고, 선동에 흔들리고, 긴 글을 피하고, 질문을 하지 않으며, 소수의견을 듣지 않는 사회. 그 바닥에는 무너진 문해력이 깔려 있다. 읽을 수 없다는 건, 곧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생각할 수 없으면, 결국 누군가의 생각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문해력은 단순한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를 해석할 수 있는 감각이자,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윤리이며,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다. 문해력이 무너진 자리에 혐오가 자라고, 혐오가 자란 자리에 진실은 묻힌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단지 글을 읽는 법을 가르치는 싸움이 아니다. 세상을 읽을 수 있는 힘을 다시 세우는 싸움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지금 우리의 교실과 도서관, 그리고 식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