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문턱에 선 생명: ‘희생될 수 없음’이라는 버려짐의 신성

김주만 전도사 2026. 1. 15. 11:14

문턱에 선 생명: ‘희생될 수 없음’이라는 버려짐의 신성

 

우리는 대개 “죽을 수 있다”는 말에서 자연의 한계를 떠올린다. 모든 생명은 유한하고, 죽음은 그 유한성의 최종적인 표지다. 그러나 아감벤이 던지는 문장은 자연의 이야기가 아니다. “죽일 수 있으나 희생제물로 바칠 수 없는 생명.” 여기서 죽음은 더 이상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다. 죽음은 정치적 사건이며, 무엇보다 언어의 사건이다. 누군가의 죽음이 공동체의 문장 안으로 들어올 때, 그 죽음은 애도되고 해석되며 기억된다. 반대로 누군가의 죽음이 문장 밖으로 밀려날 때, 그 죽음은 ‘사건’이 되지 못한다. 살아 있었으나 서사로 남지 못하고, 죽었으나 의미로 남지 못한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 바로 그 문턱에 선 생명이다. 공동체가 “너는 우리 밖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생명은 바깥으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더 기이한 방식으로 안에 갇힌다. 안에 있으되 바깥인 상태. 보호의 언어에 들어오지 못한 채, 폭력의 가능성에만 노출된 상태.

 

‘희생’이 금지된다는 것은 얼핏 들으면 구원의 소식처럼 들린다. 누가 제물로 바쳐지지 않는다는 것은, 신에게 바쳐지는 죽음의 통로에서 빠져나온다는 뜻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감벤이 문제 삼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희생은 잔혹하지만, 동시에 공동체가 승인한 죽음이다. 승인된 죽음은 언어를 갖는다. “왜 죽었는지”를 말해 주는 언어가 있고, “무엇을 위해 죽었는지”를 설명하는 장치가 있다. 희생은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인간을 공동체의 의미에 봉사시키지만, 그 의미의 회로 안에 죽음을 배치한다. 죽음이 설명된다. 이해되든 이해되지 않든, 최소한 공동체가 그 죽음에 대해 책임지는 척이라도 한다.

 

반면 “희생될 수 없는” 죽음은 다르다. 그것은 공동체의 의미 회로 바깥에서 일어난다. 아무도 그 죽음을 제의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역사적 과업의 이름으로 불러 세우지 않는다. 그 죽음은 “우리의 질서를 세우는 죽음”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희생될 수 없음은 곧 보호받지 못함으로 이어진다. 죽음이 공동체의 문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때, 그 생명은 더 쉽게 죽임을 당할 수 있다. 누구도 그것을 ‘사건’으로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애도는 사건을 필요로 하고, 책임은 사건을 필요로 한다. 사건이 되지 못한 죽음은 애도되지 않고, 애도되지 않는 죽음은 반복된다.

 

여기서 ‘성스러움’이라는 말이 뒤집힌다. 우리는 성스러움을 보호의 빛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고대의 사크레(sacer)가 가진 어두운 이면을 통과하면, 성스러움은 곧 금기가 된다. 금기는 손대지 말라는 명령이지만, 동시에 내 것이 아니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공동체는 어떤 존재를 “건드리지 마라”고 말하면서도, 그 존재를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건드릴 수 없게 하는 것과 지킬 책임을 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래서 호모 사케르는 이상한 방식으로 “신성”하다. 누구의 삶에도 속하지 않게 된 채, 누구의 보호에도 속하지 않게 된 채, 그저 경계 표식처럼 놓인다. 이 신성은 신을 향한 경외가 아니라, 공동체가 만들어 낸 버려짐의 표지다.

 

아감벤의 통찰이 무서운 이유는, 이것이 특수한 역사적 사례가 아니라 정치의 일반 구조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법은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우리는 배운다. 그러나 법은 보호를 말하는 만큼, 보호의 외부를 만들어 낸다. 법이 “이것은 보호한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에 대해 “이것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구분이 함께 작동한다. 여기서 결정적인 장치가 등장한다. 아감벤이 ‘포함적 배제’라고 부르는 것. 어떤 생명은 공동체 바깥으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자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바깥’이라는 공간에 배치된다. 그 생명은 시민이 아니기에 권리의 언어로 보호받지 못하지만, 동시에 완전히 외부인이어서 공동체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생명은 공동체 내부의 안정과 정체성을 위해 끊임없이 호출된다.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 “우리는 저들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 이때 호모 사케르는 공동체의 거울이 된다. 그 거울 속에서 공동체는 자기의 문명을 확인한다. 문명은 종종 야만을 외부에 세움으로써 자신을 문명이라고 선언한다.

 

이 구조가 ‘주권’과 연결될 때, 아감벤의 논리는 날카로워진다. 주권은 법을 세우는 권력으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주권은 예외를 선포할 수 있는 권력이다. 법이 멈추는 순간, 그 멈춤을 선언하는 자가 드러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법의 멈춤은 법의 무력화가 아니라 법의 절대화로 변한다. “지금은 예외다”라는 말은 곧 “지금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예외상태는 법이 사라진 무정부가 아니라, 법이 폭력과 직접 접속하는 상태다. 절차가 사라지고, 판결이 사라지고, 증명이 사라지는데도, 통치는 더 강해진다. 왜냐하면 통치가 이제 법을 통해 정당화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필요’가 정당화한다. ‘안전’이 정당화한다. ‘공공’이 정당화한다. 그리고 그 정당화의 끝에는 언제나 어떤 생명의 ‘노출’이 있다. 보호의 문장 바깥으로 밀려난 생명,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못한 생명. 죽일 수 있으나, 희생할 수 없는 생명.

 

이제 질문은 학술적인 영역을 떠나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온다. 호모 사케르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무수한 문턱들로 이루어져 있다. 회사의 문턱, 학교의 문턱, 공동체의 문턱, 가족의 문턱, 심지어는 ‘정상’이라는 이름의 문턱. 우리는 서로를 보호하는 언어를 발명하면서, 동시에 보호하지 않을 언어를 발명한다. “그 사람은 원래 그래.” “자업자득이지.” “규정상 어쩔 수 없어.” “그건 네 책임이야.” 이 문장들은 무심해 보이지만, 어떤 생명을 희생의 언어로도, 보호의 언어로도 들이지 않는 방식으로 바깥에 세운다. 당신이 힘든데도, 그 힘듦은 “사건”이 되지 못한다. 당신이 무너져도, 그것은 “정리해야 할 문제”일 뿐 “함께 져야 할 무게”가 아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삶을 조용히 호모 사케르의 자리로 밀어 넣는다. 죽일 의도가 없는데도, 어떤 생명을 ‘살아도 되는 정도’로만 취급함으로써 우리는 그 생명을 조금씩 죽인다. 애도하지 않는 방식으로, 책임지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나 이 개념을 타인을 향한 고발로만 사용하면, 우리는 금방 또 다른 폭력을 만들게 된다. 아감벤을 읽는 정직한 길은, 먼저 자기 삶의 문턱을 보는 것이다. 내 안에도 호모 사케르가 있다. 나 자신을 대하는 방식 속에도 “죽일 수 있으나 희생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나는 어떤 부분의 나를 공동체의 서사에서 지워 버리는가. 어떤 감정과 어떤 상처를 “그 정도는 참아”라고 말하며 사건이 되지 못하게 하는가. 나는 나를 보호하는 문장에 들이지 못한 채, 그저 기능과 생산성과 역할로만 살아남게 만들지는 않았는가. 자신의 고통을 정당화하지 못하는 사람은, 종종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언어도 잃는다. 자기에게조차 애도하지 못하는 삶은, 결국 누구도 애도하지 못하게 된다.

 

호모 사케르의 무서움은 그래서 단지 국가 폭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삶을 조직하는 방식의 문제다. 누가 ‘사건’이 되는가. 누가 ‘이야기’가 되는가. 누가 ‘보호’의 문장에 들어오는가. 그리고 누가 ‘관리’의 문장으로만 남는가. 여기서 철학은 추상적 개념을 늘어놓는 기술이 아니라, 문장을 재편하는 작업이 된다. 한 생명을 살린다는 것은, 종종 그 생명이 들어갈 수 있는 문장을 다시 만드는 일이다. “너는 설명될 가치가 있다.” “너는 애도될 가치가 있다.” “너는 책임의 범주 안에 있다.” 이런 문장들이 우리를 구원한다. 반대로 “너는 설명될 필요가 없다” “너는 애도될 필요가 없다” “너는 책임의 바깥이다”라는 문장들이 우리를 버린다.

 

그렇다면 아감벤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원하는가. 희생을 만들어 의미를 유지하는 공동체인가, 아니면 희생조차 허락하지 않으며 생명을 방치하는 공동체인가. 혹은 그 둘을 넘어, 생명을 문턱에 세우지 않는 공동체가 가능한가. 여기서 우리는 단순한 ‘법의 개혁’이나 ‘제도의 개선’만을 말할 수 없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더 근본적인 층위는 언어와 상상력이다. 누군가를 보호의 문장 안으로 들이는 일은 결국, 그를 ‘우리의 이야기’ 안으로 들이는 일이다. 그리고 그때 공동체는 한 걸음 성숙해진다. 보호는 감정이 아니라 구조이며, 구조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나는 이 칼럼을 읽는 당신에게, 거창한 시대 진단보다 더 구체적인 질문 하나를 남기고 싶다. 당신의 삶에서 “희생될 수 없음”이 버려짐으로 변한 자리는 어디인가. 누구의 고통이 사건이 되지 못한 채 흩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 자신은 어디에서 스스로를 사건으로 만들지 못한 채, 기능으로만 버티고 있는가.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저항은, 법정이 아니라 일상에서 시작될 때가 많다. 애도해야 할 것을 애도하는 것. 책임져야 할 것을 책임지는 것. 무엇보다, 누군가의 삶을 문장 밖으로 몰아내지 않는 것.

 

호모 사케르는 “죽일 수 있으나 희생할 수 없는” 생명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장을 제대로 읽는다면, 그것은 공포의 선언이 아니라 경고이자 초대가 된다. 그 초대는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가 문턱에 서 있기 전에, 문턱 자체를 의심하라. 누군가가 바깥으로 밀려나기 전에, 바깥을 만드는 언어를 멈추라. 그리고 다시 문장을 만들라. 보호의 문장, 애도의 문장, 책임의 문장. 그 문장들이 생명을 살린다. 생명은 항상 먼저 존재하지만, 공동체 안에서 생명이 ‘살아진다’는 것은 결국 그 생명이 들어갈 문장이 있을 때 가능하다. 오늘 우리는 어떤 문장을 만들 것인가. 그리고 그 문장은 누구를 안으로 들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