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권력은 흐른다: 소유가 아닌 실천의 문제

김주만 전도사 2025. 7. 29. 16:06

권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오래도록 정치 철학자들과 사회 이론가들은 이 질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절대군주의 칼날에서, 기업가의 연봉 계약서에서, 목회자의 강단에서, 교사의 출석부에서 권력은 다양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본질은 하나의 실체가 아니다. 권력은 일정한 주체가 움켜쥐고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구조와 맥락 속에서 유동적으로 흐르는 힘이다. 정적인 권력 개념은 실상 권력의 운동성을 가리기 쉽다.

 

막스 베버는 권력을 “타인의 저항을 무릅쓰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능력”으로 설명했지만, 그는 또한 정당성이 결여된 권력은 지속될 수 없음을 지적했다. 권력은 단순히 강압이나 폭력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동의와 인정, 수용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교실 안의 교사는 단순히 권위를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학생과의 신뢰 관계 속에서 권력을 부여받는다. 동의 없는 권력은 단기적 효과만을 낳고, 언젠가는 붕괴한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떠오른다. “정당성”은 과연 도덕성을 담보하는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된 권력조차도 때때로 비도덕적인 결정을 내리며, 제도적 정당성이 반드시 윤리적 정당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합법적 권력’은 ‘정의로운 권력’과 동일하지 않다. 따라서 권력은 언제나 감시되어야 하고, 지속적으로 질문받아야 한다. 권력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윤리적이 될 수도, 억압적이 될 수도 있다.

 

푸코는 권력을 ‘억압’이 아니라 ‘생산’으로 보았다. 그는 권력이 억압적인 법이나 형벌만이 아니라, 학교, 병원, 군대, 심지어 언어와 규범을 통해 사람을 형성하고 길들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우리는 권력 아래서 존재를 부여받고, 정체성을 규정당하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 의미에서 권력은 억압이 아니라 형성이다. 그러나 동시에 형성된 자아는 그 권력 구조에 순응하도록 훈련되기도 한다.

 

이러한 권력의 양면성은 자유와도 깊이 연관된다. 우리는 민주주의 속에서 자유를 보장받는다 생각하지만, 그 민주주의 역시 권력 구조의 하나다. 선거는 시민이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이지만, 동시에 권력을 위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위임된 권력은 다시 제도와 법을 통해 개인의 행동을 규율한다. 이렇듯 자유와 권력은 단순히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얽히고설킨 관계 안에 있다.

 

문제는 권력이 언제 ‘선을 넘는가’이다. 존 액턴은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말했다. 권력은 일정 수준 이상 축적되면 자기목적화의 길로 들어선다. 본래의 이상이나 목표는 사라지고, 권력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권력은 타락한다. 자기 보존의 논리에 빠진 권력은 외부의 견해에 귀 기울이지 않고, 내부의 논리로 자신을 정당화하며, 비판을 억압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권력이 부패하지 않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구조적으로는 견제와 균형, 그리고 감시가 작동하는 체제가 필요하다. 삼권분립, 언론의 자유, 시민사회의 활성화는 이를 위한 기본 조건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권력의 본질을 ‘소유’가 아니라 ‘실천’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권력은 누가 가지고 있는가보다, 그것이 어떻게 행사되는가가 본질적이다.

 

우리는 흔히 권력을 ‘주는 것’과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더 깊은 수준에서는 권력은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학교 교장은 학생에게 권력을 부여하지 않지만, 학생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는 순간, 교장의 말은 권력이 된다. SNS에서도 마찬가지다. 팔로워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권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영향력을 인정하고 따라주는 사람들, 즉 ‘관계’가 형성되어야 비로소 권력은 실체를 갖는다. 따라서 권력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다.

 

이때 우리는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누가 권력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그 권력은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라고. 우리가 권력을 정의하는 방식은 곧 우리가 사회를, 인간을, 공동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종교의 영역에서도 이 질문은 유효하다. 목회자는 단지 직책 때문에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 권위는 공동체의 신뢰, 투명한 삶, 진실된 가르침을 통해 형성되는 관계적 결과다.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선 먼저 권위를 인정받아야 한다. 즉, 영적 권위란 ‘내려놓음’ 속에서만 참된 힘을 얻는다. 권력을 움켜쥘수록 공동체는 흩어지고, 권력을 나눌수록 공동체는 살아난다. 이것이 권력의 아이러니다.

 

결국, 우리는 권력을 두려워해야 할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권력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 본질이 무엇인지, 어떤 식으로 형성되고 유지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권력을 어떻게 흘러가게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권력은 결코 고여 있을 수 없다. 고인 권력은 부패하고, 흐르는 권력은 생명을 낳는다.

 

따라서 권력은 특정인의 소유가 아니라, 모두가 책임져야 할 흐름이다. 우리가 권력에 대해 어떤 윤리를 세우는지, 어떤 언어로 권력을 비판하는지, 어떤 실천으로 권력을 사용하고 견제하는지가 우리의 사회를 바꾼다.

 

권력은 흐른다. 그 흐름이 억압이 될지, 해방이 될지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권력은 그 자체가 선도 악도 아니다. 그러나 그 권력이 누구를 향하고, 누구에게서 비롯되며,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내는가에 따라—그 권력은 생명이 되거나, 파괴가 된다. 오늘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