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존재를 성적표로 환산하지 마라: 경쟁과 평가 너머의 교육을 향하여

김주만 전도사 2025. 7. 30. 09:56

우리는 아이들에게 묻는다. “몇 점이었니?”, “몇 등 했니?”, “어느 대학 가고 싶니?” 그러나 묻지 않는다. “오늘 너는 어떤 생각을 했니?”, “지금 어떤 마음이니?”, “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니?” 성취의 숫자로 존재를 측정하는 사회. 이 구조 안에서 아이들은 자신을 타인의 기대와 평가로 규정당한다. 그것은 어쩌면 점점 더 정교해지는 감옥이다. 성적이라는 잣대에 맞춰 자기를 형성하고, 실패라는 낙인에 자신의 생애를 접어버리는, 비극의 이름이 ‘교육’이 되어버린 풍경이다.

 

이 구조는 아이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하게 만든다. 친구가 곧 경쟁자이며, 교실은 전쟁터가 된다.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곧 낙오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학원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도 ‘최고’를 강요당한다. 그러나 이 ‘최고’는 누구의 기준인가. 공동체의 필요도, 아이들의 재능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 기준 아래에서, ‘평균 이하’로 분류된 아이들은 점점 말이 줄어들고, 꿈이 사라지고, 삶의 의미에 대한 감각마저 잃어버린다.

 

문제는 단지 경쟁이 심하다는 데 있지 않다. 경쟁이 곧 자기 존재의 의미로 오해되고 있다는 데 있다. 존재의 무게를 ‘성적’으로 환산하고, 삶의 가치를 ‘진학’으로 축소시키는 담론 속에서, 청소년들은 점점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 삶을 계산하고, 미래를 투자로 이해하며, 인간을 효율과 성과로 나누는 이 구조는 인간을 소비재처럼 평가하는 문화로 이어진다.

 

청소년 우울증은 이 구조의 징후다. 단순한 정서의 기복이 아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누적되어 언어조차 잃어버린 상태다. 아무도 내 마음을 물어보지 않았고, 나조차도 나에게 무관심했던 시간들 속에서 자아는 서서히 무너진다. “괜찮아?”라는 말 한마디보다 “공부는 잘 되고 있니?”라는 질문이 더 익숙한 사회에서, 아이들은 감정을 표현할 기회를 상실한다. 감정은 억압되고, 관계는 기능화된다. 그리고 정체성은 성취의 도구로만 전락한다.

 

그 결과, 실패는 단순한 좌절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전면적 부정으로 다가온다. 자기비난이 내면화되고, 완벽주의적 사고는 자기파괴적 경향으로 발전한다. 삶은 피로해지고, 일상은 버거워진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단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구조가 강요한 통과의례이며, 모두가 그것을 ‘정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집단적 방기다. 청소년의 고통은 사회가 유예한 책임의 그림자다.

 

이제는 전환이 필요하다. ‘경쟁’이 아닌 ‘공존’을, ‘성취’가 아닌 ‘성장’을 중심에 두는 교육으로의 방향 전환이다. 첫째, 평가의 기준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 점수라는 획일적 수치가 아니라, 학생 개개인의 내면적 변화와 자율적 탐구를 중심으로 한 성찰적 평가가 필요하다. 단순한 지식의 암기에서 벗어나 삶의 맥락 속에서 사유하고 질문할 수 있는 교육이어야 한다.

 

둘째, 정서적 돌봄이 교육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 교사는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관계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아이들의 말 없는 표정, 짧은 대답, 무기력한 눈빛을 읽어낼 수 있는 감수성이야말로 오늘의 교육자가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자질이다. 상담교사의 배치를 늘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사 전체가 ‘상담적 존재’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교실은 지식보다 감정을 먼저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셋째, 부모와 사회의 인식 전환도 절실하다. 자녀의 미래를 위한 걱정이 결국 자녀의 현재를 파괴하는 모순을 직시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가 성취하기 전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고 존중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사회는 성취한 자에게만 박수를 보내는 문화를 멈추고, 자기의 속도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제도의 개혁 못지않게, 문화의 전환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육’의 목적을 다시 물어야 한다. 교육은 단지 경제적 성공을 위한 사전 준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예비 작업이다. 경쟁을 통해 적자를 걸러내는 기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자신의 고유한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길잡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무엇이 될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교육은 단지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청소년의 고통은 미래에 대한 경고다. 그들이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증거다. 이제 방향을 돌려야 한다. 점수보다 표정에 집중하고, 등수보다 눈빛을 들여다보며, 경쟁보다 존재 자체에 귀 기울이는 사회. 그런 사회가 될 때, 우리는 다시 교육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미래 인재 양성’이라는 공허한 구호보다 훨씬 더 사람다운 말일 것이다. 교육이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며, 존재의 무게를 가르치는 일이기 때문이다.